(충북뉴스 백범준의 해우소) 잠잠하던 한량병(病)이 도졌다. 그래봤자 며칠이고 떠나봤자 절집이다. 

지난주 잠시 미뤄두었던 관음성지순례를 핑계 삼아 괴나리봇짐 둘러매고 무작정 남도로 떠났다. 물 맑은 섬진강변 화엄사, 쌍계사를 들려 해수관음성지 남해 보리암을 거쳐 해남 대흥사로 떠나는 여정이었다. 

오늘 이야기는 그중 해남 대흥사(大興社)에 관한 이야기다.

대흥사는 전라남도 해남군 삼산면 구림리의 두륜산 도립공원 내에 있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22교구 본사이다. 노승봉과 두류봉등 여덟 개의 봉우리가 빙 둘러 감싸고 있는 산간분지 터에 자리 잡고 있다. 

절터를 가로질러 흐르는 금당천(金塘川)을 경계로 북원(北院)과 남원(南院)으로 구분된 가람배치는 이 절집만의 특징이다.

금당천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넘으면 북원의 출입문인 누각이 나오는데 그 이름은 침계루(枕溪樓)이다.

여기서 침은 베게 침 枕 인데 계곡을 베게 삼다라는 뜻이다. 그 의미를 곱씹으니 신선놀음이 따로 없다. 

계곡을 베게 삼아 누워 있노라면 없는 도(道)도 닦이고 있는 번뇌는 씻길 것만 같은 선사들의 작명센스에 필자는 또 한 번 고개를 숙인다. 

침계루를 통해 북원으로 들어가면 드디어 대흥사 대웅보전(大雄寶殿)이 모습을 드러낸다. 

오늘 이야기는 대웅보전 그중에 현판에 관한 이야기다.

전설 또는 정설 진실여부를 떠나 어찌되었든 전해지는 이야기는 이렇다. 조선의 4대 명필 중 2인인 원교 이광사(李匡師)와 추사 김정희(金正喜)가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제주도 귀양길을 가던 추사가 전부터 알고 지내던 초의선사를 만나기 위해 대흥사에 들린다.

추사는 초의선사에게 현장에서 ‘대웅보전’과 ‘무량수각’의 편액글씨를 휘호한 뒤 호통을 치며 원래 붙어있던 원교의 글씨를 당장 떼어 내리고 자신의 글씨를 걸라고 한다.

조선의 글씨를 다 망쳐 놓은 것이 원교 이광사라는 이유에서였다.

초의선사는 추사의 극성에 못 이겨 그의 말을 따랐다. 그 후 63세 노령으로 귀양지에서 풀려나 서울로 올라가는 길에 다시 대흥사에 들른 추사는 초의를 만나 옛날에는 내가 잘 못 보았으니 원교의 현판을 다시 걸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현재 대웅본전의 현판은 원교 이광사의 글씨라는 이야기다. 아마도 진실이 아니라면 후대의 호사가들이 노론과 소론이란 정적 집안의 두 인물들로 만들어낸 에피소드에 불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일화의 진위여부를 떠나 추사는 서원교필결후(書員嶠筆訣後)라는 글로 원교를 비판하고 혹평하였다.

추사는 평생에 열 개의 벼루를 밑창내고 붓 천 자루를 몽당붓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태어나기도 전에 세상을 떠난 원교의 글씨가 그런 추사의 눈에는 배움이 부족하고 기본이 안 된 글씨지도 모른다. 비판과 비평은 자유다.

그러나 그런 비평을 반박할 수도 없는 죽은 자를 향한 일방적인 비평은 썩 아름답진 않다. 추사의 비평이 그렇다.

인과응보인지 이미 죽은 자인 추사의 글씨를 혹평하는 이가 있다. 

도올 김용옥선생은 이렇게 말한다. “추사의 만 획이 원교의 일 획에 미치지 못한다.” 인간의 결이 다르고 내공의 경지가 다르다는 말도 덧붙인다.

원교 이광사빠인 필자 역시 적극 동의하는 바이다.

이랬거나 저랬거나 해남 대흥사에는 원교의 판액도 추사의 판액도 비 맞고 눈 맞고 바람 맞으며 말없이 붙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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