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시문화산업진흥재단 김호일 사무총장] 한가위를 앞둔 가을 들녘에는 코스모스가 한창이다. 

수정처럼 반짝이는 ‘대청호’에는 고향으로 떠나지 못한 ‘여름 철새’들이 마치 어머니의 소녀 시절 친정집 같은 갈대밭에서 곧 있을 이별의 아쉬움에 하루하루를 보내는듯하다. 

필자에게는 청주에서 맞이하는 세 번째 가을이 아직도 어색하고 여전히 부끄럽다. 

청주국제공항에서 시내로 들어오는 ‘오창평야’에는 고개 숙인 벼들이 추수를 기다리고 ‘오근장역’ 가는 길목에는 이제 곧 물들기를 기다리는 고목들이 가을 행락객을 맞이하고 있다.

이 가을 고개 숙인 벼들이 쏟아내는 황금 빛깔은 자연의 빛으로 더없이 숭고하며, 마치 청주 출신 ‘박영대’ 화백께서 담아내는 완성의 캔버스처럼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이 가을 청주의 가을빛은 찬란하되 번쩍이지도 않고, 황홀하되 자극적이지도 않으며, 눈부시되 찬란하지도 않다. 

고개를 숙이고 있는 벼들의 모습은 겸허하고 거룩하다.  ‘상당산성’ 오르는 길 언덕배기 밭두렁에도 호박꽃의 황금 빛깔이 정겹다. 

내가 자란 고향 길과 사뭇 다르지도 않다. 농부의 손길이 닿은 낡은 ‘비닐하우스’들이 이 시대의 역사처럼 줄지어 있다.

농토는 모든 아버지의 인생이며, 고추밭 가꾸시는 어머니의 마음은 하늘의 정성이다. 폭우가 내려 유난히도 힘들게 했던 지난여름도 잊히고 이제는 바람과 비가 만나서 빚어낸 상처의 빛깔들을 저 들판이 감당하는 것은 아닐까?

이름 모를 작은 마을 농가의 가족에게 풍요를 주는 저 가을 들판에 서서 벼들처럼 나도 고개를 숙일 수 있을까. 

누구는 ‘벼가 고개를 숙이는 것은 단지 고개를 들면 먼저 잘려나가기 때문이다’라고 한 말이 생각난다. 

이제 곧 추수가 끝나면 들판도 말끔히 비워지겠지. 찬란하던 황금빛도 사라지고 흙으로 녹아 퇴비의 색이 될 터이다. 

내 인생은 어떤 색일까? 노력도 시련도 없이 보호색을 칠하며 화려한 색깔을 탐하여 온 것은 아닐까. 계절의 여왕이 봄이라면 가을은 계절의 황제이다. 

벼들이 고개 숙인 들녘에는 어김없이 허수아비가 서 있다. 생명력도 없이 바람을 타고 헛 모습만 뽐내고 있는 나는 허수아비는 아닐까. 산천과 들판을 찬란하게 하는 태양빛은 무채색이지만 눈이 부시다. 

문득 ‘무심천’과 ‘미호천’의 저녁노을도 365일 붉지만은 않다. 구름에 가린 날들도 있으며 폭풍전야를 만나기도 한다. 바다와 하늘이 둘이 아닌 것은 모두가 우주에 매달려 있기 때문일 것이다. 

가을의 한복판에 이르는 시월에는 저기 ‘우암산’자락과 ‘상당산’ 앞으로 펼쳐진 ‘맑은 고을’로 뻗어 나가면 있을 ‘속리산’이나 ‘화양계곡’이라도 또 한 번 찬찬히 만나보고 싶다.

고향 집 문 앞 떠날 때 잘 가거라! 하시던 어머니.

나는 지난해 추석, 어머니의 손을 놓고 돌아 나오던 발걸음이 무거워 참으로 죄송했다. 

구순을 넘기신 어머니다.

그런 어머니를 올해 추석에는 찾아뵙지도 못할 것 같다. 대신, 오늘 오후 핸드폰 너머 들려주신 어머님의 음성에서 절절히 녹아있는 이 아들을 기다리시는 그 마음을 잊지 않아야 한다.

이 가을을 지나고 11월이 오면 20개월을 준비한 청주공예비엔날레도 끝이 날 것이다.

어느 날 객지에서 온 사람이 하는 일이라 공격도 심할 것이다. 여지없이 도마 위에 올라온 생선이다. 일을 끝내고 결과가 나오기도 전에 이미 매서운 시선들이 여기저기 있다.

이 모든 일 또한 자업자득(自業自得)이리라. 

본시 세상일이라는 것이 이래도 탈 저래도 탈이다. 급한 일 없는 주말에는 한 이틀 어머니를 모시고 청주의 이곳저곳을 찬찬히 구경시켜 드려야겠다.

아마도 이러한 필자의 마음은 요 며칠 사이에 청주를 찾을 청주 출신의 이른바 고향을 떠난 인사들과 청주 이외의 자신의 고향으로 발길을 향할 귀성객들 역시 같은 마음이 아닐까.

그래서 우리는 추석을 민족 최대의 명절이라고 부르며 외국인들이 보았을 때 이해 못 하는 민족의 대이동을 하는 것이리라.

20년의 역사를 쌓아온 제10회 청주공예비엔날레의 조직위원회 구성원들과 40일간 열악한 공간에서 수고하신 160명의 운영위원 그리고 11명의 공동감독님께 감사하다.

비엔날레 마치고 일 끝나면 나는 도마 위의 생선이지 싶다. 나의 애간장까지 열 토막 스무 토막 잘리지 싶다.

어차피 도마 올라간 죽은 고기 대가리 꼬리 몸통 나누어졌을 때쯤 이 세상눈과 입들을 불러 함께 나누는 식탁을 바라보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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