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뉴스 백범준의 해우소) ‘엄마’라는 두 글자만을 쓰고 한동안 모니터만 바라본다. 쓸 것이 없어서가 아니다. 쓸 것이 많아서도 아니다.

정리되지 않은 생각과 정화되지 않은 감정과 정돈되지 못한 현실 속에서 엄마 역시 여자라는 사실을 잠시 잊고 있었다. 아니 애써 잊었다.

하지만 오늘은 온전히 그녀만을 생각하고 말할 것이다.

아들로서 엄마에 대한 일종의 채무감은 아니다. 혹여 그에 따른 상환의무로 써 내려가는 글 역시 아니다.

글을 쓰는 지금 시점이 나의 생일이고, 그녀를 처음 대면한 날이기에 쓰는 것 또한 아니다. 언젠가 쓰고 싶었던 이야기다. 그날이 오늘일 뿐이다.

내 삶의 모든 시작은 그녀로부터였다. 아침에 일어나서 잠들기 까지 생존을 위한 행동들은 모두 그녀의 자상한 가르침 덕분이다.

세수하는 법, 양치하는 법, 젓가락질, 숟가락질, 신발 끈 묶는 법, 어른을 보면 인사를 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었고 가르쳐 주었다.

태어나 내 눈에, 내 입에, 내 귀에 들어오는 새로운 모든 것들은 언제나 그녀와 함께였다.

어느 날인가 고열에 구토가 심한 나를 들쳐 업고 병원으로 뛰던 그녀는 나보다 더 겁에 질려있었다. 그녀의 등에서 느껴지던 심장소리는 잊은 적 없다.

그녀에게 받은 사랑의 반의반의 반이라도 내 자식에게 내리 갚겠다고 다짐하던 날과 갑사치마저고리 차려입고 아들 보내며 큰절 받던 날 그녀 눈엔 눈물이 고였다.

나도 이렇게 태어났겠구나. 몸소 까지는 아녀도 옆에서 지켜 본 열 달과 “내 새끼가 새끼를 다 낳는구나” 하던 그날도 그녀는 눈물을 훔쳤다.

효도라고는 엄마친구의 자식들이나 하는 거라고 스스로를 속이며 뻔뻔하게 살아가던 내가 그녀의 일흔 번째 생일날 그 흔한 동남아여행 보내주는 대신 적당히 떨어진 금값 덕분에 손목에 채워줄 수 있었던 한 냥에 못 미치는 18K 팔찌가 유일한 효도였다.

“너도 네 자식 낳아보면 안다”며 그녀가 부모로서의 책임과 의무의 고단함을 토로했던 날들도 나는 외면했고, 지금도 외면한다.

‘가장’으로서의 나를 스스로 포기하겠다던 그날 밤 나는 울었지만, 그녀는 울지 않았고 그 후로도 울지 않는다.

내 자식에 대한 친권, 양육권과 면접교섭권이라는 생소한 권리를 맞바꾸던 날도 그녀는 눈물대신 “나도 내 새끼가 중요하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그녀의 지인들은 내가 아직도 서울에서 부가세와 종소세와 종부세를 납부하는 자리 잡은 자영업자로 알콩달콩 사는 줄 안다. 상관없다. 나는 어차피 불효자이기 때문이다.

이제는 더 이상 받아쓰기 만점으로 그녀를 웃게 해줄 수 없는 나이가 됐다.

한 달에 한번 보여주는 그녀의 손주 재롱은 그리 많이 남아 있지도 않다. 내가 먹을 수 있는 그녀의 김장김치가 몇 해 남아 있는지도 모른다.

뭔지도 모르고, 남의 집 딸들에게 수없이 뱉었던 ‘사랑’이란 단어를 그녀에게 나는 단 한 번도 말한 적이 없다.

그렇게 여전히 나는 불효자다. 지금도 나는 완벽한 불효자답게 그녀가 읽지도 않을 글을 빌려 비겁하게 이렇게 얘기한다.

연임씨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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